짝꿍과 오랜만에 가는 나들이였다.
원래 계획은 국립현대미술관 근처 갤러리를 구경하고, 북한산자락길을 걷는 거였다. 경복궁역에서 마을버스 타고 쓱 들어가면 나오는, 무장애길로 소문난 길이다. 한동안 천식으로 고생하다 회복되던 중이었기 때문에 이 코스는 꼭 걸어보고 싶었다. 마침 짝꿍도 쉬는 날이라서 가을바람도 쐴 겸 길을 나섰다.
<북한산자락길 안내>
https://www.sdm.go.kr/culture/attraction/sub2070.do
내가 분명 오랜 동안 걸어다녔던 곳이고, 이곳저곳 모르는 곳이 없을 정도의 동네였다. 심지어 짝꿍에게도 지도따위 찾아볼 필요없다고, 나만 믿으면 된다고 큰소리까지 쳤더랬다.
근데 예상치 못한 난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밖에 나가고 싶은 날은 남들한테도 밖에 나가 놀고 싶은 날이라는 사실. 길거리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삼청동에 이렇게 인파가 많은 건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라 괜히 벅차기까지 했다. 갤러리 가는 길도 빽빽하게 꽉 차서 횡단보도 한번 건너는 데 투지가 필요할 정도였다.
그래서 미묘하게 뭔가 잘못되었다. 원래 가려던 방향에서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슬쩍 돌아가며, "어차피 이 동네는 다 연결되어 있으니 조금만 걷다 옆 골목으로 들어가지 뭐." 라고 한 게 실수였다.
사람없이 한적한 길의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사진을 대충찍고 보정 없이 올려도 맑고 기분 좋은 그런 날.
하지만 10분 넘게 담벼락을 따라 걷다가 짝꿍에게 미안한 질문을 던졌다.
"이 길 맞겠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틀렸다. 담벼락을 따라 아주 크게 한 바퀴 돌아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짝꿍은 킥킥대며 "으이그, 그럼 그렇지- 안 믿어 네 말."라며 날 믿지 못하겠다고 놀렸다.
길치, 방향치들의 고충은 늘 거기 있다. 굉장히 오래 알고 산 동네고, 지리를 다 알아도 막상 닥치면 길을 헷갈린다는 것.
그렇지만 뭐 어떡하겠어. 그냥 걷는 거다. 쭉 걸었다. 오랜만에 운동하는 셈 치고 걸어보았다. 그러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이 생각났다.
[청와대]
https://maps.app.goo.gl/MKNiL9gm5xny69G58
길 헷갈린 김에 큰맘 먹고 청와대를 둘러보자는 즉흥적인 계획으로 방향을 확 틀었다.
사람들이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거리를 기어이 걸어가서 청와대를 마주했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청와대 건물은 햇살을 제대로 머금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한 감상이라는 건, 어쩐지 하나같이 낭만과는 거리가 먼 것들 뿐이다.
"와, 이 카펫 관리하는 데 진짜 빡세겠다."
"저 샹들리에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닦아줘야 할 텐데"
"와 이 장식들 좀 봐. 이거 누가 다 닦아?"
심지어 바로 옆 무리에서는 '카펫 멋있다!'며 감탄하고 있는데 말이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샹들리에 관리는 진짜 힘들잖아..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닌걸.
청와대 산책로를 따라 석조여래좌상까지 쭉 걸었는데, 이곳을 걸으며 느낀 건… 묘하게 자유가 억압받는 곳이었다는 점이다.
"아, 여긴 자유가 없구나."
뭐든 완벽하게 갖춰진 공간인데도 이상하게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넓은 땅에 오롯이 국정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모두 갖춰졌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답답한 느낌이 강했다. 오히려 그런 것들까지 해결하게 만들어놨기 때문에 답답한 걸까? 그리고 묘하게 어디서든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도 느껴졌다. 일반인이고 대중인 우리야 이제는 청와대를 즐기면 그만이고, 구경하면 그만인데 이곳에 살았던 대통령들은 꽤나 답답하지 않았을까 싶다.
영빈관까지 돌고 나와 보니 어느덧 두 시간 정도가 훌쩍 지나 있었다. 나와 짝꿍이 세 시 전에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청와대 본관에 입장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 서서 대기 중이었다. 결국 인파에 밀려 청와대를 빠져나와야 했다.
그래도 꽤 즐거운 나들이였다. 천식 때문에 종종 기침하고 숨차서 쉬었지만, 단풍도 조금씩 물들어 가고 하늘은 구름 한 점없이 쨍해서 기분이 좋았다.
이날 16500보를 걸은 것으로 나오는데 거리상으로 약 11.5km라 한다.
오랜만에 원 없이 걸었다.
청와대에 입장하려니 관람 예약이 필수였다. 청와대 정문 앞에 엑스배너와 안내소가 설치되어 있고, 안내된 QR코드를 통해 바로 관람 예약할 수 있었다. 도와주시는 분들도 많아서 금방 예약할 수 있다.
https://www.opencheongwadae.kr/mps/reservation/form?menuId=MENU002010300000000
https://www.tistory.com/event/write-challenge-2024
'그 날의 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동채칼 후기 (feat. 내돈내산) (0) | 2024.12.20 |
---|---|
네이버에 있다가 티스토리로 왔다 (0) | 2024.12.08 |
휴대하기 좋은 독서대 추천 (feat. 내돈내산) (3) | 2024.11.27 |
세탁 세제, 신세계를 맛보다 (feat. 내돈내산) (5) | 2024.11.26 |
결혼기념일, 글램핑 241013 (4) | 2024.11.13 |